Foo Fighters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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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oo Fighters》는 데이브 그롤이 너바나 해체 후 우울증을 겪던 중 솔로 프로젝트로 시작하여 1995년 발표한 앨범이다. 그롤이 작사, 작곡, 연주, 프로듀싱을 담당했으며, 펑크 록,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등 다양한 장르의 영향을 받았다. 이 앨범은 평론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여 미국 빌보드 200에서 23위, 영국 앨범 차트에서 3위를 기록했다. "This Is a Call", "I'll Stick Around", "Big Me" 등의 싱글이 발매되었으며, 미국에서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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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 Fighters (음반) - [음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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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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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 푸 파이터스 |
발매일 | 1995년 7월 4일 |
녹음일 | 1994년 10월 17일–23일 |
스튜디오 | 로버트 랭, 시애틀 |
장르 | 펑크 록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멜로딕 하드코어 포스트 그런지 |
길이 | 44분 04초 |
레이블 | 로즈웰 캐피틀 |
프로듀서 | 데이브 그롤 배럿 존스 |
다음 음반 | The Colour and the Shape |
다음 음반 발매 년도 | 1997년 |
싱글 | |
싱글 1 | This Is a Call |
싱글 1 발매일 | 1995년 6월 19일 |
싱글 2 | I'll Stick Around |
싱글 2 발매일 | 1995년 9월 4일 |
싱글 3 | For All the Cows |
싱글 3 발매일 | 1995년 11월 20일 |
싱글 4 | Big Me |
싱글 4 발매일 | 1996년 2월 25일 |
2. 배경
1990년 데이브 그롤은 너바나에 드러머로 합류했다. 투어 중 틈틈이 기타를 치며 곡을 썼지만, 커트 코베인의 곡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자신이 쓴 곡을 밴드에 공개하지는 못했다.[81] 1992년에는 '레이트!(Late!)'라는 가명으로 데모 앨범 《Pocketwatch》를 발매하기도 했다.[82]
1994년 4월, 커트 코베인의 사망 이후 그롤은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83] 음악을 듣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조차 힘겨워했으며, 다른 밴드의 드러머 제안을 받았지만, 너바나 시절을 떠올리게 될까 봐 음악 경력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83][84]
하지만 1994 MTV 영화제에서 백비트 밴드와 공연하고 마이크 와트의 앨범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녹음하는 것이 "일종의 카타르시스 치료"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85][84] 결국 그는 시애틀의 로버트 랭 스튜디오에서 《Pocketwatch》 프로듀서 배럿 존스와 함께 솔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결심한다.[86] 이 프로젝트는 그롤이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스튜어트 코플랜드의 《Klark Kent》처럼 밴드의 작품이라고 믿게 만들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이었다.[88]
2. 1. 너바나와 데이브 그롤
1990년 데이브 그롤은 그런지 밴드 너바나의 드러머로 합류했다. 투어 기간 동안 그는 기타를 가지고 다니며 곡을 썼지만, 프론트맨 커트 코베인이 쓴 곡들에 "경외심"을 느껴 밴드 멤버들에게 그 곡들을 공유하는 것을 꺼렸다.[2] 그롤은 종종 스튜디오 시간을 예약하여 데모와 커버곡을 녹음했고, 1992년에는 'Late!'라는 가명으로 데모 앨범 ''포켓워치''를 발매했다.[3]2. 2. 커트 코베인의 사망과 그 이후
1990년 데이브 그롤은 너바나에 드러머로 합류했다. 투어 기간 동안 그는 기타를 가지고 다니며 곡을 썼지만, 프론트맨 커트 코베인이 쓴 곡들에 "경외심"을 느껴 밴드 멤버들에게 그 곡들을 공유하는 것을 꺼렸다.[81] 그롤은 종종 스튜디오 시간을 예약하여 데모와 커버곡을 녹음했고, 1992년에는 'Late!'라는 가명으로 데모 앨범 《Pocketwatch》를 발매했다.[82]1994년 4월 커트 코베인의 자살 이후, 그롤은 우울증에 빠졌고, 음악을 듣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 모두 어려워했다. 그는 댄지그나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와 같은 밴드에서 드러머로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경력을 포기할 뻔했다. 그는 "그것은 단지 내가 너바나에 있었던 것을 상기시켜 줄 것이고, 드럼 세트에 앉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곤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83][84]
너바나 해체 후 그롤의 첫 번째 음악 공연은 1994년 6월 MTV 무비 어워드에서 백비트 밴드와 함께 한 것이었다. 그 동안 그는 마이크 와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음반 《Ball-Hog or Tugboat?》에 참여했다. 공연을 즐긴 후[85], 그롤은 "직접 작곡한 이 노래들을 녹음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 치료"로 작동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음악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84] 이후 그롤은 집 근처에 위치한 시애틀의 로버트 랭 스튜디오에 6일 동안 시간을 예약했는데, 그곳에서 《Pocketwatch》 프로듀서 배럿 존스의 도움을 받아[86] "지난 4, 5년 동안 아무도 듣지 못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했다.[87] 이 아이디어는 그롤이 모든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사람들이 스튜어트 코플랜드의 《Klark Kent》와 유사한 밴드라고 믿게 만드는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이었다.[88]
2. 3. 솔로 프로젝트의 시작
1990년 데이브 그롤은 너바나의 드러머로 합류했다. 투어 동안 그는 기타를 가지고 다니며 곡을 썼지만, 프론트맨 커트 코베인이 쓴 곡들에 "경외심"을 느껴 밴드와 공유하기를 꺼렸다.[81] 그롤은 1992년 '레이트!'라는 가명으로 데모 음반 《Pocketwatch》를 발매하면서 때때로 데모와 커버곡을 녹음하기 위해 스튜디오 시간을 예약했다.[82]1994년 4월 커트 코베인의 자살 이후, 그롤은 우울증 상태에 빠졌고, 음악을 듣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 모두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댄지그나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 같은 밴드에서 드러머로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경력을 포기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는 "그것은 단지 내가 너바나에 있었던 것을 상기시킬 것이고, 드럼 세트에 앉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83][84]
너바나 해체 후 그롤의 첫 번째 음악 공연은 1994년 6월 MTV 무비 어워드에서 백비트 밴드와 함께 공연한 것이었다. 그동안 그는 마이크 와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음반 《Ball-Hog or Tugboat?》에 참여했다. 공연을 즐긴 후[85], 그롤은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들을 녹음하는 것이 "일종의 카타르시스 치료"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만의 음악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84] 이후 그롤은 집 근처에 있는 시애틀의 로버트 랭 스튜디오에 6일 동안 녹음 시간을 예약했는데, 그곳에서 《Pocketwatch》 프로듀서였던 배럿 존스의 도움을 받아[86] "지난 4, 5년 동안 아무도 듣지 못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했다.[87] 이 프로젝트는 그롤이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스튜어트 코플랜드의 《Klark Kent》처럼 밴드의 작품이라고 믿게 만들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이었다.[88]
3. 음반 제작
그롤은 익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읽고 있던 ''Above Top Secret''이라는 미확인 비행 물체 책에서 "푸 파이터(foo fighter)" 현상을 설명하는 챕터에서 이름을 따와 푸 파이터스라는 이름으로 곡을 발표할 계획이었다.[7][12] 이는 매우 조용하게 발표될 예정이었으며, 세션이 끝난 후 LP 레코드 100장만 제작될 예정이었다.[8] 그롤은 시애틀에 있는 카세트 복제 연구소에 가서 세션의 카세트 복사본 100개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피드백을 받았다.[13] 에디 베더(Eddie Vedder)는 1995년 1월 8일 자신의 ''Self-Pollution'' 라디오 방송에서 녹음된 두 곡을 처음으로 공개했고,[7] 이 녹음은 음악 업계에 빠르게 퍼져나가 음반사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캐피톨 레코드(Capitol Records)와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게리 거쉬 사장이 너바나의 레이블인 게펜 레코드(Geffen Records)에서 함께 일한 그롤의 개인적인 친구였기 때문이다.[5][14]
세션 도중 그롤은 톰 페티로부터 한 달 후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에서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와 함께 공연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 공연 이후 하트브레이커스의 정식 멤버가 되라는 초대가 이어졌지만, 페티는 푸 파이터스에 대해 들은 후 그롤에게 이 솔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라고 격려했다.[16] 그롤은 곧 정식 밴드를 모집했는데, 여기에는 최근 해체된 써니 데이 리얼 에스테이트의 베이시스트 네이트 멘델과 드러머 윌리엄 골드스미스, 그리고 너바나 투어 기타리스트이자 전 Germs 멤버인 팻 스미어가 포함되었다.[4]
3. 1. 녹음
1994년 10월, 그롤은 존스와 함께 일주일 동안 음반을 제작했으며, 보컬과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했다. 아침에 로버트 랭 스튜디오(Robert Lang Studios)에 도착하여 정오부터 작업을 시작해 하루에 네 곡을 녹음했다.[6] 녹음 과정에서 그롤은 방을 오가며 "드럼을 치느라 땀을 흘리고 몸을 떨면서 기타를 잡고 트랙을 만들고, 베이스를 연주하고, 어쩌면 또 다른 기타 파트를 연주한 다음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음 노래를 녹음하러 갔다"고 회상한다.[6] 외부인이 참여한 유일한 경우는 어프간 위그스(The Afghan Whigs)의 그렉 덜리(Greg Dulli)가 "X-Static"에서 기타 파트를 연주한 것이다.[11] 그롤은 그에게 연주할 것인지 물어보고 기타를 건넸다고 한다.[11]각 곡을 완성하는 데 약 45분이 걸렸고, 곡들은 앨범의 트랙 순서와 동일하게 녹음되었다.[8] "I'll Stick Around"는 완성하기 전에 두 번의 시도가 필요했던 유일한 곡이었다.[8] 그롤은 자신의 노래 실력에 불안감을 느껴 "Floaty"에 목소리 효과를 추가했고,[26] 이중 녹음을 통해 목소리를 더 강하게 만들려고 시도했다.[6]
믹싱 세션은 로버트 랭 스튜디오(Robert Lang Studios)에서 시작되었지만(그롤이 나눠준 100개의 테이프에 사용됨) 결국 폐기되었고, 롭 슈냅프(Rob Schnapf)와 톰 로스록(Tom Rothrock)의 캘리포니아주 아카타(Arcata, California)에 있는 "The Shop" 스튜디오로 옮겨졌다. 믹스는 1972년 월리 하이더(Wally Heider) 레코딩의 '스튜디오 4'를 위해 프랭크 데메디오가 맞춤 제작한 32채널 API DeMedio 콘솔에서 이루어졌다. 재생에는 스티븐스 24트랙 2인치 테이프 머신이 사용되었다. 믹스에 사용된 프로세서는 보컬과 기타 솔로를 위한 Eventide 옴니프레서 압축기, 드럼을 "쪼개고" 다시 믹싱하는 데 사용되는 것뿐만 아니라 전체 믹스에도 사용되는 앨런 스마트 스테레오 압축기가 포함되었다. 다른 프로세서로는 UREI 1176 및 LA3A 압축기, 딜레이를 위한 Echoplex, "엉망인 디지털 리버브" 등이 있었다. 롭은 "20분 만에 'Big Me'를 믹싱했다"고 회상하며 믹싱이 "그렇게 미친 수준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15]
3. 2. 믹싱
앨범의 믹싱은 롭 슈냅프(Rob Schnapf)와 톰 로스록(Tom Rothrock)이 캘리포니아주 아카타(Arcata, California)에 있는 "The Shop" 스튜디오에서 진행했다. 원래 믹싱 세션은 로버트 랭 스튜디오(Robert Lang Studios)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믹싱은 폐기되었다.[15]믹싱에는 1972년 월리 하이더(Wally Heider) 레코딩의 '스튜디오 4'를 위해 프랭크 데메디오가 맞춤 제작한 32채널 API DeMedio 콘솔이 사용되었다. 재생에는 스티븐스 24트랙 2인치 테이프 머신이 사용되었다. 믹스에 사용된 프로세서는 다음과 같다.[15]
장비 | 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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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tide 옴니프레서 압축기 | 보컬과 기타 솔로 |
앨런 스마트 스테레오 압축기 | 드럼을 "쪼개고" 다시 믹싱, 전체 믹스 |
UREI 1176 및 LA3A 압축기 | |
Echoplex | 딜레이 |
"엉망인 디지털 리버브" |
롭 슈냅프는 믹싱이 "그렇게 미친 수준은 아니었다"고 말하며, "20분 만에 'Big Me'를 믹싱했다"고 덧붙였다.[15]
4. 음악 스타일 및 구성
앨범에 수록된 곡 대부분은 데이브 그롤이 너바나에 합류하기 전이나 그 기간 동안 작곡했으며, 멀티트랙 녹음 8트랙 테이프 녹음기를 사용한 홈 데모 형태로 만들어졌다.[16] 코베인 사후에 작곡된 곡은 "This Is a Call", "I'll Stick Around", "X-Static", "Wattershed"이다.[5][17]
4. 1. 음악 스타일
이 음반의 사운드는 주로 펑크 록,[18][19][21] 그런지,[45][20] 얼터너티브 록,[20][21] 멜로딕 하드코어,[22] 그리고 포스트 그런지로 묘사되었다.[23][24] AllMusic의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이 앨범이 "90년대 중반까지도 제대로 된 뮤지션과 작곡가만 있다면 이 장르가 완전히 진부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개의 펑크 팝 보석"이라고 말했다.[43] 이 음악은 "Smells Like Teen Spirit"와 "Heart-Shaped Box"와 같은 너바나 트랙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럽고 큰 다이내믹을 가진 하드 록 사운드를 주로 따랐으며,[8] 변형으로는 그롤이 "슬프지만 기분 좋게 만드는" 곡이라고 정의한 멜랑콜리한 "Exhausted"가 있다.[8]
''Foo Fighters'' 앨범의 대부분의 가사는 녹음을 시작하기 전 20분 동안 그롤이 쓴 무의미한 가사이다.[25] 그롤은 "15곡을 녹음할 시간이 7일밖에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이 가능한 한 잘 어울리고, 모든 것이 팽팽하고 동기화되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의자에 앉아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5][17] 커트 코베인의 죽음 이후 "너무 할 말이 많았고" "첫 번째 푸 파이터스 앨범의 의미에 많은 비중이 실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횡설수설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덧붙였다.[16]
그롤은 "순간적으로 쓰는 것들이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낸다. 이제 그것들을 보면 그 중 일부가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 같다"[5][17]고 생각했고, 몇몇 곡은 "지난 4, 5년간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가사를 담고 있다고 밝혔다. 그중에서도 그롤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자 당시 부인이었던 제니퍼 영블러드에게 바치는 "노골적인 러브송"인 "Big Me"가 눈에 띈다고 밝혔다.[26] 너바나의 공격적이고 반항적인 주제와는 대조적으로, 그롤은 "이것은 '안녕'과 '감사합니다'"라는, 그롤의 삶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긍정적이고 쾌활한 곡인 "This Is a Call";[8] 장난스러운 "For All the Cows"; 마이크 와트를 언급하는 제목과 그롤의 "하드코어와 올드 스쿨 펑크 록에 대한 사랑"을 묘사하는 가사가 담긴 "Wattershed"와 같은 곡들을 만들었다.[8]
4. 2. 곡 구성 및 가사
앨범에 수록된 9곡은 그롤이 너바나에 합류하기 전이나 그 기간 동안 작곡되었으며, 그롤이 자신의 홈 데모에서 제작한 멀티트랙 녹음 8트랙 테이프 녹음기에서 만들어졌다.[16] 코베인의 사망 이후 작곡된 유일한 곡은 "This Is a Call", "I'll Stick Around", "X-Static" 및 "Wattershed"였다.[5][17] 이 앨범의 사운드는 주로 펑크 록,[18][19][21] 그런지,[45][20] 얼터너티브 록,[20][21] 멜로딕 하드코어,[22] 그리고 포스트 그런지로 묘사되었다.[23][24] AllMusic의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이 앨범이 "90년대 중반까지도 제대로 된 뮤지션과 작곡가만 있다면 이 장르가 완전히 진부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개의 펑크 팝 보석"이라고 말했다.[43] 이 음악은 "Smells Like Teen Spirit"와 "Heart-Shaped Box"와 같은 너바나 트랙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럽고 큰 다이내믹을 가진 하드 록 사운드를 주로 따랐다.[8] 변형으로는 그롤이 "슬프지만 기분 좋게 만드는" 곡이라고 정의한 멜랑콜리한 "Exhausted"가 있다.[8]''Foo Fighters'' 앨범의 대부분의 가사는 녹음을 시작하기 전 20분 동안 그롤이 쓴 무의미한 가사이다.[25] 그롤은 "15곡을 녹음할 시간이 7일밖에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이 가능한 한 잘 어울리고, 모든 것이 팽팽하고 동기화되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의자에 앉아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5][17] 그롤은 코베인의 죽음 이후 "너무 할 말이 많았고" "첫 번째 푸 파이터스 앨범의 의미에 많은 비중이 실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횡설수설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덧붙였다.[16]
그롤은 "순간적으로 쓰는 것들이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낸다. 이제 그것들을 보면 그 중 일부가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 같다"[5][17]고 생각했고, 몇몇 곡은 "지난 4, 5년간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가사를 담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그롤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라고 묘사한, 당시 부인이었던 제니퍼 영블러드에게 바치는 "노골적인 러브송"인 "Big Me"가 눈에 띈다고 밝혔다.[26] 너바나의 공격적이고 반항적인 주제와는 대조적으로, 그롤은 "이것은 '안녕'과 '감사합니다'"라는, 그롤의 삶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긍정적이고 쾌활한 곡인 "This Is a Call";[8] 장난스러운 "For All the Cows"; 마이크 와트를 언급하는 제목과 그롤의 "하드코어와 올드 스쿨 펑크 록에 대한 사랑"을 묘사하는 가사가 담긴 "Wattershed"와 같은 곡들을 만들었다.[8]
5. 앨범 커버 및 제목
"푸 파이터스"라는 밴드 이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비행기 조종사들이 다양한 UFO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표현에서 따왔다.[83] 이러한 공상 과학 테마는 그롤의 캐피톨 레코드 임프린트인 로스웰 레코드의 이름에서도 이어지는데, 이는 1947년 로스웰 UFO 사건으로 유명한 뉴멕시코주 로스웰을 가리킨다.[27]
앨범 커버에는 벅 로저스 XZ-38 분해 광선총이 등장하는데, 일부 평론가들은 커트 코베인의 자살과 관련하여 부적절하다고 여겼으나, 데이브 그롤은 이를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일축했다.[5][17]
그롤이 앨범의 유일한 참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캐피톨의 요청에 따라 라이너 노트에는 그롤이 모집한 전체 밴드의 사진이 포함되었다.[30]
5. 1. 앨범 커버 아트
《Foo Fighters》의 앨범 커버는 데이브 그롤의 당시 부인이었던 사진작가 제니퍼 영블러드가 디자인했다.[89] 커버에는 벅 로저스 XZ-38 분해 광선총이 등장한다.[89] 앨범명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조종사들이 UFO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용어에서 유래한 것처럼,[83] 앨범 커버의 SF 테마는 1947년 로즈웰 UFO 사건으로 유명한 뉴멕시코주 로즈웰 시를 언급한 그롤의 캐피틀 레코드와 이어진다.[89]일부 평론가들은 커트 코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고려할 때 커버에 실린 총이 둔감하다고 여겼으나,[90] 데이브 그롤은 이를 그저 우연의 일치로 무시했다.[83][91] 윌리엄 골드스미스는 "모든 것은 푸 파이터스의 로즈웰, 우주 물건, 고풍스러운 벅 로저스 분해기 권총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완전히 별개의 것입니다. 데이브는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어요."라고 설명했다.[83][91]
5. 2. 밴드 이름의 유래
"푸 파이터스"라는 이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비행기 조종사들이 다양한 UFO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표현에서 따왔다.[83] 이러한 공상 과학 테마는 1947년 로즈웰 UFO 사건으로 유명한 뉴멕시코주 로즈웰 시를 언급한 그롤의 캐피틀 레코드, 그리고 벅 로저스 XZ-38 분해기 권총을 특징으로 한 그롤의 당시 부인이었던 사진작가 제니퍼 영블러드의 음반 커버로 더욱 이어진다.[89] 일부 평론가들은 커트 코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고려할 때 커버에 실린 총이 둔감하다고 여겼으나, 그롤은 이를 그저 우연의 일치로 무시했다.[83][91] 윌리엄 골드스미스는 나중에 "모든 것은 푸 파이터스의 로즈웰, 우주 물건, 고풍스러운 벅 로저스 분해기 권총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완전히 별개의 것입니다. 데이브는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어요."라고 설명했다.[83][91]6. 발매 및 홍보
1995년 봄, 푸 파이터스는 마이크 와트의 Ring Spiel Tour를 지원하는 최초의 미국 투어를 시작했으며, 에디 베더가 포함된 호버크래프트도 함께했다.[29] 데이브 그롤과 베더는 투어 기간 동안 와트의 백킹 밴드 멤버로 각각 드럼과 기타를 연주했다.
''푸 파이터스''는 1995년 7월 4일 캐피톨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다. 밴드는 앨범 발매 홍보를 위해 울과 Shudder to Think와 함께 25회 콘서트를 개최했다. 또한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 "This Is a Call"을 연주하며 지상파 TV에 데뷔했다. 그 후 Pukkelpop, 레딩, 로울랜즈에서 공연하며 유럽 페스티벌 무대에 데뷔했다.[30]
"I'll Stick Around"는 1995년 9월 4일에 두 번째 싱글로 발매되었으며, 제럴드 카살레가 감독한 푸 파이터스의 첫 뮤직 비디오가 제작되었다. 그 가을, 밴드는 Built to Spill과 함께 유럽 투어를 진행했고,[31]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방문했다.[30] 1995년 한 해 동안 거의 100회, 이듬해에는 70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다.[30]
"For All the Cows"는 1995년에,[32] "Big Me"와 "Alone + Easy Target"은 1996년에 싱글로 발매되었다.[33] "Big Me"는 미국에서 발매된 밴드의 첫 번째 상업 싱글이었으며, 제시 페레츠가 감독한 이 곡의 뮤직 비디오는 멘토스 캔디 광고를 패러디했다.[34]
6. 1. 발매 과정
1995년 봄, 푸 파이터스는 마이크 와트의 Ring Spiel Tour를 지원하는 최초의 미국 투어를 시작했으며, 당시 라인업에는 에디 베더가 포함된 호버크래프트도 함께했다.[29] 같은 해 5월, 라디오 방송국 KROQ-FM과 KNDD는 캐피톨로부터 중지 및 시정 요구를 받기 전까지 아직 발매되지 않은 앨범의 일부 트랙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 해 6월, "Exhausted"와 "This Is a Call"이 대학 라디오와 모던 록 라디오 방송국으로 보내졌으며,[14] 일주일 후 "This Is a Call"은 밴드의 첫 번째 상업 싱글이 되었다.[27]''푸 파이터스''는 1995년 7월 4일, 캐피톨 레코드를 통해 배포된 로스웰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밴드는 그해 여름 울과 Shudder to Think와 함께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25개의 콘서트를 개최하며 앨범 발매를 홍보했다. 푸 파이터스는 또한 8월 14일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 "This Is a Call"을 연주하며 지상파 텔레비전 데뷔를 했다. 그 후 밴드는 Pukkelpop, 레딩, 로울랜즈에서의 공연으로 유럽 페스티벌 무대에 데뷔하며 당시까지 가장 큰 규모의 공연을 여러 차례 펼쳤다.[30]
"I'll Stick Around"는 1995년 9월 4일에 두 번째 싱글로 발매되었으며, 제럴드 카살레가 감독한 푸 파이터스의 첫 뮤직 비디오가 제작되었다. 그 가을, 밴드는 Built to Spill과 함께 유럽 투어를 하고,[31]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방문하면서[30] 광범위한 투어를 계속했다. 이 투어는 1996년 7월 20일 피닉스 페스티벌에서의 공연으로 마무리되었다. 푸 파이터스는 1995년에 거의 100회, 이듬해에는 70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다.[30]
앨범의 다른 세 곡도 싱글로 발매되었다. "For All the Cows"는 1995년에,[32] "Big Me"와 "Alone + Easy Target"은 1996년에 발매되었다.[33] "Big Me"는 미국에서 발매된 밴드의 첫 번째 상업 싱글이었으며, 제시 페레츠가 감독한 이 곡의 뮤직 비디오는 멘토스 캔디 광고를 패러디했다.[34]
6. 2. 프로모션 및 투어
1995년 봄, 푸 파이터스는 마이크 와트의 Ring Spiel Tour를 지원하는 첫 미국 투어를 시작했으며, 에디 베더가 포함된 호버크래프트도 함께했다.[29] 그롤과 베더는 투어 기간 동안 와트의 백킹 밴드 멤버로 각각 드럼과 기타를 연주했다.
''푸 파이터스''는 1995년 7월 4일, 캐피톨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다. 밴드는 그해 여름 울과 Shudder to Think와 함께 25회의 콘서트를 열며 앨범을 홍보했다. 8월 14일에는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 "This Is a Call"을 연주하며 지상파 TV에 데뷔했다. 이후 Pukkelpop, 레딩, 로울랜즈 등 유럽 페스티벌 무대에도 섰다.[30]
"I'll Stick Around"는 1995년 9월 4일에 두 번째 싱글로 발매되었고, 제럴드 카살레가 감독한 푸 파이터스의 첫 뮤직 비디오도 공개되었다. 그해 가을, 밴드는 Built to Spill과 함께 유럽 투어를 진행했으며,[31]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도 공연했다.[30] 이 투어는 1996년 7월 20일 피닉스 페스티벌 공연으로 마무리되었다. 푸 파이터스는 1995년에 거의 100회, 1996년에는 70회 이상의 콘서트를 열었다.[30]
7. 평가
《푸 파이터스》는 여러 음악 평론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이 앨범이 너바나의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하면서도, 데이브 그롤의 개성과 음악성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그런지의 강렬함과 팝적인 멜로디의 조화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그롤이 모든 악기를 혼자 연주했기 때문에 밴드 특유의 역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199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얼터너티브 음악 앨범 부문 후보에 오르는 등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상업적으로도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서 23위로 데뷔했고, 뉴질랜드, 영국, 호주, 캐나다 등 여러 국가에서 상위권에 올랐다. 특히 미국에서는 발매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음반 산업 협회(RIAA)로부터 골드 및 플래티넘 인증을 받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2011년 기준으로 북미에서만 146만 8천 장 이상 판매되어 밴드의 두 번째 베스트셀러 앨범이 되었다.
7. 1. 비평가들의 평가
《푸 파이터스》는 발매와 동시에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앨범을 너바나와 비교했다.[27]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데이비드 브라운은 "그롤의 곡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너바나 데모의 맹렬한 울림을 담고 있으며, 그의 목소리는 커트 코베인의 과장되고 격정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41] 《스핀》의 테리 서튼은 이 앨범을 너바나의 두 번째 앨범인 《네버마인드》와 비교하며, "앨범의 전반부는 [...] 《네버마인드》에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네버마인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듣고 싶어진다."라고 말했다.[42] 《케랑!》의 폴 리스는 "《푸 파이터스》는 그롤의 거친 울부짖는 목소리나 여러 곡들이 부드럽고-부드럽고-크게 이어지는 방식과 관계없이, 커트 코베인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이 앨범을 "그 자체의 장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고 평가했다.[25] 《빌보드》는 "영감 넘치는 작곡과 열정적인 퍼포먼스"를 칭찬하며, 이 앨범이 그런지 팬들을 기쁘게 할 수 있으며 "그린 데이, 더 오프스프링부터 베터 댄 에즈라까지 다른 록 및 펑크 음악의 트렌드세터들을 팬들에게 떠올리게 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28]몇몇 비평가들은 그롤이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했기 때문에 강렬함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올뮤직의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그가 앨범을 혼자 녹음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밴드의 원초적인 사운드 작업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솔로 뮤지션으로서의 결과는 매우 인상적이다."라고 썼다.[43] 《롤링 스톤》의 알렉스 포게는 이 음반을 "놀랍지만 차분한 솔로 데뷔"라고 묘사했으며, "앨범의 유일한 실망스러운 점은 홈 스튜디오 느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작자에 대해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라고 평했다.[44] 《뉴욕》은 전체적인 멜로디와 그롤의 노래 모두 그런지 사운드의 파생물이라고 묘사했지만, "타이트한 비틀즈풍의 하모니"와 "밸리스피크의 더 시적인 순간"을 담은 가사를 칭찬했다.[45] 로버트 크리스가우는 《더 빌리지 보이스》에서 이 밴드가 "정신"은 보여주지만 "정체성"이 부족하며, "Big Me"와 "This Is a Call"을 하이라이트 곡으로 언급했다.[46] 그는 나중에 그의 《컨슈머 가이드》 책에서 이 앨범에 대해 세 개의 별을 주며 가작으로 선정했는데, 이는 "압도적인 미학이나 개별적인 비전을 가진 소비자들이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작품"임을 나타낸다.[47]
이 앨범은 199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얼터너티브 음악 앨범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그롤의 전 밴드 너바나의 앨범인 《MTV 언플러그드 인 뉴욕》에 밀려 수상하지 못했다.[48] 《케랑!》은 《푸 파이터스》를 올해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했고,[49] 《롤링 스톤》은 PJ 하비의 《투 브링 유 마이 러브》에 이어 두 번째로 선정했다.[50] 또한 《빌리지 보이스》의 파즈 & 조프 투표에서 6위,[51] 《스핀》의 목록에서 20위를 기록했다.[52]
매체 | 평가 |
---|---|
올뮤직 | [43] |
블렌더 | [35] |
시카고 트리뷴 | [36] |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 B+[41] |
가디언 | [37] |
NME | 9/10[38] |
Q | [39] |
롤링 스톤 | [44] |
롤링 스톤 앨범 가이드 | [40] |
스핀 | 7/10[42] |
7. 2. 상업적 성과
''푸 파이터스''(Foo Fighters)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에서는 첫 주에 4만 장이 판매되어 빌보드 200에서 23위로 데뷔했다.[58] 이 앨범은 뉴질랜드 앨범 차트에서 2위,[53] 영국 음반 차트에서 3위를 기록했는데,[54] 그 주에 가장 높은 신규 진입이었다.[55] 호주 ARIA 차트에서는 5위를 기록했고,[56] 캐나다 앨범 차트에서도 5위에 올랐다.[57] 12월까지 미국 내에서 90만 장, 전 세계적으로 200만 장이 판매되었다.[58]1995년 9월 27일, 미국 음반 산업 협회(RIAA)로부터 골드 인증을 받았고,[59] 1996년 1월 26일에는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59] 2011년까지 ''푸 파이터스''는 북미에서 146만 8천 장이 판매되어, ''The Colour and the Shape''에 이어 밴드의 두 번째로 많이 판매된 앨범이 되었다.[60] 또한 캐나다와 영국에서도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지역 | 인증 | 판매량/출하량 |
---|---|---|
오스트레일리아 (ARIA) | Gold | |
캐나다 (Music Canada) | Platinum | |
뉴질랜드 (RMNZ) | Gold | |
영국 (BPI) | Platinum | 374,187[93] |
미국 (RIAA) | Platinum |
8. 곡 목록
모든 곡은 데이브 그롤이 작사/작곡하였다.
번호 | 제목 | 재생 시간 |
---|---|---|
1 | This Is a Call | 3:53 |
2 | I'll Stick Around | 3:52 |
3 | Big Me | 2:12 |
4 | Alone + Easy Target | 4:06 |
5 | Good Grief | 4:01 |
6 | Floaty | 4:30 |
7 | Weenie Beenie | 2:46 |
8 | Oh, George | 3:00 |
9 | For All the Cows | 3:30 |
10 | X-Static | 4:14 |
11 | Wattershed | 2:15 |
12 | Exhausted | 5:45 |
일본판 보너스 트랙 (일반 버전 및 2007년 재발매 미니 LP 버전)과 미국 No. 1 한정 보너스 팩 보너스 디스크, 특별 오즈 투어 에디션 보너스 디스크는 다음과 같다.
음반 | 번호 | 제목 | 작사/작곡 | 재생 시간 | 비고 |
---|---|---|---|---|---|
일본판 보너스 트랙 | 13 | Winnebago | 데이브 그롤, Geoff Turner | 4:13 | |
14 | Podunk | 3:04 | |||
미국 No. 1 한정 보너스 팩 보너스 디스크 | 1 | Winnebago | 데이브 그롤, Geoff Turner | 4:13 | |
2 | Podunk | 3:04 | |||
3 | How I Miss You | 4:54 | |||
4 | Ozone | 에이스 프레일리 커버 | 4:16 | ||
특별 오즈 투어 에디션 보너스 디스크 | 1 | Winnebago | 데이브 그롤, Geoff Turner | 4:13 | |
2 | Podunk | 3:04 | |||
3 | How I Miss You | 4:54 | |||
4 | Ozone | 에이스 프레일리 커버 | 4:16 | ||
5 | For All the Cows | 3:33 | 1995년 8월 26일 리딩 페스티벌 라이브 | ||
6 | Wattershed | 2:15 | 1995년 8월 26일 리딩 페스티벌 라이브 |
- 이 앨범은 일반 트랙 리스트로 2003년(CD)과 2011년(LP 및 다운로드용)에 재발매되었다.
9. 참여진
이 음반에는 푸 파이터스의 데이브 그롤이 보컬,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프로듀싱을 맡았고, 그렉 덜리가 "X-Static"에 추가 기타로 참여했다.
기술진으로는 자크 샤르티에(재킷 아트워크), 스티브 컬프 (엔지니어링), 커트 도티 (사진), 팀 가보 (아트 디렉션, 앨범 디자인), 바렛 존스 (프로듀싱), 스티븐 마커슨 (마스터링), 찰스 피터슨 (사진), 제프 로스 (사진), 톰 로크와 롭 슈냅 (믹싱), 제니퍼 영블러드 (커버 사진, 사진)가 참여했다.
9. 1. 푸 파이터스
9. 2. 추가 참여진
'''기술진'''
이름 | 역할 |
---|---|
자크 샤르티에 | 재킷 아트워크 |
스티브 컬프 | 엔지니어링 |
커트 도티 | 사진 |
팀 가보 | 아트 디렉션, 앨범 디자인 |
바렛 존스 | 프로듀싱 |
스티븐 마커슨 | 마스터링 |
찰스 피터슨 | 사진 |
제프 로스 | 사진 |
톰 로크 | 믹싱 |
롭 슈냅 | 믹싱 |
제니퍼 영블러드 | 커버 사진, 사진 |
9. 3. 기술진
역할 | 이름 |
---|---|
프로듀싱, 보컬,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 데이브 그롤 |
추가 기타 ("X-Static") | 그렉 덜리 |
재킷 아트워크 | 자크 샤르티에 |
엔지니어링 | 스티브 컬프 |
사진 | 커트 도티 |
아트 디렉션, 앨범 디자인 | 팀 가보 |
프로듀싱 | 바렛 존스 |
마스터링 | 스티븐 마커슨 |
사진 | 찰스 피터슨 |
사진 | 제프 로스 |
믹싱 | 톰 로크, 롭 슈냅 |
커버 사진, 사진 | 제니퍼 영블러드 |
10. 차트
순위